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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목회자 전용 기도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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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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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3.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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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3.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 맺는말 ”
맺는말
― 산당을 허물고 하나님께 돌아가자


제1절 다시 아랏에서 ― 역사가 남긴 경고

이 책은 아랏에서 시작된 하나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곳의 산당 안에서 보았던 “HOLY OF HOLIES”라는 글자는 저자에게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았다. ‘지성소’라는 거룩한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이 놓여 있던 자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가 아니었다.

거룩한 이름과 왜곡된 예배가 한 공간 안에 함께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거룩한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 예배의 중심까지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시작되었다. 이제 이 책의 긴 여정을 지나 다시 그 아랏의 산당 앞으로 돌아온다.

이스라엘의 산당과 우상숭배에서 시작하여 한국교회의 신사참배와 역사적 실패를 돌아보고, 회개와 십자가, 교회의 회복에 이르기까지 걸어왔지만 처음의 질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내용을 지나온 지금 그 질문은 더욱 분명해진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은 이 책의 처음에 있었고 마지막에도 그대로 남는다. 아랏의 산당은 단순히 과거의 종교생활을 보여 주는 고고학 유적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된다. 거룩한 장소가 있고, 거룩한 이름을 사용하며, 거룩해 보이는 의례가 행해진다고 해서 그곳의 모든 것이 자동으로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장소의 명칭이나 외형이 아니라 실제로 누가 중심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거룩한 이름을 붙이고 종교적 형식을 갖추어도 그것은 또 다른 산당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아랏의 산당은 과거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의 교회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제2절 한국교회의 실패와 해방, 분단의 기억

한국교회 역사에서 신사참배는 국가가 예배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신사참배가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라는 논리가 제시되었지만, 명칭이 그 행위의 본질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다. 결국 공교회가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결정을 내렸고 이를 거부한 이들은 투옥과 고난, 순교를 감당해야 했다. 신사참배의 핵심 문제는 예배질서의 전복에 있었다.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경외와 충성의 자리에 국가와 천황이 들어오면서 하나님께 속한 첫 자리가 침해되었다. 문제는 단지 일본의 신사를 향해 절을 했다는 외형적 행위에만 있지 않았다. 하나님보다 국가와 권력이 앞서는 질서를 교회가 받아들였다는 데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러므로 신사참배의 역사를 기억하는 목적은 오늘 우리 자신을 살피고 같은 본질의 우상이 다른 모습으로 들어올 때 분별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위한 데 있다. 1938년 9월 9일 평양에서 제27회 총회가 개회되었고, 그 회기 중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결의를 하였다.

1945년 8월 15일에는 일제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교회에는 신사참배의 공적인 죄를 어떻게 회개하고 바로잡을 것인가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다.

1948년 9월 9일에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한반도의 분단이 서로 다른 체제로 굳어졌다. 이 역사 역시 교회와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무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 책이 이러한 날짜들을 다루는 목적은 숫자를 신비화하거나 사건들을 직접적인 인과관계로 묶기 위한 것이 아니다. 8·15는 해방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고, 9·9는 실패와 분단의 역사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신앙적 기억의 표지가 된다.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성찰하기 위해서다. 성찰은 회개로 이어져야 하고, 회개는 다시 순종으로 이어져야 한다.

과거의 실패를 알면서도 오늘의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기억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역사를 바라보는 마지막 방향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데 있다.

제3절 “그들이”가 아니라 “우리가” ― 십자가와 화해의 길

이스라엘의 죄를 말할 수 있고 일본의 죄를 말할 수 있으며 북한 정권의 죄와 과거 지도자들의 잘못도 말할 수 있다. 역사의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진실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죄를 밝히는 일만 계속하다 보면 자신은 심판자의 자리에 서고 상대방만 죄인의 자리에 세우기 쉽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방향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만 향하게 된다. 가장 먼저 돌아볼 사람은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 있는 바로 나 자신이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묻는 것과 함께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했는가”를 묻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다니엘의 기도는 공동체적 회개의 중요한 본을 보여 준다. 그는 자신보다 앞선 세대가 저지른 죄와 민족의 역사적 실패를 알고 있었지만, 그 역사를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과거의 사건처럼 취급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범죄하였습니다”라고 자신을 분리하기보다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섰다.
이것이 조상의 개인적 죄책이 아무 조건 없이 후손에게 자동으로 이전된다는 뜻은 아니며, 개인의 죄책과 공동체의 역사적 책임은 구별되어야 한다. 다만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를 자기 공동체의 역사로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그 역사가 남긴 결과와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성찰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회개는 “그들”에서 “우리”로 이동한다.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자리에서 자기성찰의 자리로 나아간다. 공동체의 회복은 바로 이러한 정직한 고백에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나 회개 자체가 구원의 값은 아니며, 많은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그 눈물이 속죄의 근거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아무리 깊이 반성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하더라도 자기 공로만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는 결국 십자가로 간다.

십자가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있고, 죄를 위한 속죄가 있으며,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가 있다. 인간이 자기 죄를 발견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참된 회개는 자기 의를 세우지 않는다. 자신의 눈물이나 결단을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붙든다. 회개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십자가에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깨뜨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화목의 길을 여셨다.

고린도후서 5장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음을 말하고, 에베소서 2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막힌 담을 허물고 화평을 이루는 길임을 보여 준다. 화해는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올라가 이루어 낸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화목의 길을 여셨다. 그러므로 모든 회복의 출발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는 데 있다.

제4절 하나님께 돌아가자 ―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회개의 본질은 방향을 돌리는 것이다. 단지 죄를 후회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는 데 머물지 않고, 지금까지 향하고 있던 방향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우상에서 돌아서야 하고 자기중심에서 돌아서야 하며 불순종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리고 그 방향은 분명하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개는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죄책감에 빠져 자신을 끝없이 정죄하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를 받고 회복을 경험하며 새로운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이 회개의 열매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회개와 회복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은 모든 것을 잃은 뒤 비로소 자신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고 결단하고 실제로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더 중요한 것은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을 보고 달려가 그를 끌어안았으며,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다. 아들은 자신을 품꾼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말하려 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품꾼의 자리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아들로 맞아들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아들로서의 지위가 다시 확인되었다.

우리의 회개도 이와 같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죄를 뉘우치는 사람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났던 자리에서 돌이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우상과 자기중심과 불순종을 내려놓고, 아버지께 돌아온 아들로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두려움 속에서 종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 안에서 자녀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말에는 회개와 함께 회복의 뜻이 담겨 있다. 죄에서 돌아서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 잃었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다시 찾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이 말하는 회개의 궁극적인 방향이며 회복의 출발점이다.

이러한 고백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도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라를 하나님보다 높이지 않고 하나님 아래 바르게 두는 것이 나라 사랑의 바른 질서다. 대한민국의 애국가 1절은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노래한다. 이 표현은 나라의 보호와 존속을 인간의 힘에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탁하는 기도적 고백으로 읽을 수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장구한 시간의 표현 뒤에 “하느님이 보우하사”가 이어지는 것은, 이 나라의 보존과 평안을 하나님께 구하는 뜻을 담고 있다. 국가는 소중하지만 하나님보다 위에 있을 수 없고, 애국도 하나님 사랑을 대신할 수 없다. 나라를 사랑하되 나라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지 않고, 하나님 아래 제자리에 두는 것이 바른 질서다.

그런 점에서 애국가의 이 고백은 이 책의 중심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대한민국을 사랑한다면 대한민국 자체를 절대화할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하나님 아래 두고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께 속한 자리를 국가와 민족에게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하나님 아래 제자리에 두어야 한다.

이 책의 첫 질문은 결국 하나였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하나님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며 우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불러내는 이름도 아니다. 하나님은 주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고 역사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첫 자리를 사람과 돈과 권력과 국가와 이념과 조직과 자기 자신에게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

산당을 허물고 하나님께 돌아가자.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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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3.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 들어가는 글 ”

들어가는 글

— 아랏의 산당에서 시작된 질문


1. 수많은 성지 가운데 가장 깊이 남은 아랏

필자는 그동안 성경과 교회사에 관련된 여러 지역을 찾아다녔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흔적을 찾아보았고, 로마를 비롯하여 그리스의 아테네와 고린도 등 사도들과 초대교회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여러 곳도 직접 돌아보았다.

2007년 7월 4일부터 11일까지는 이스라엘 성지를 방문하여 엘리야의 기적을 떠올리게 하는 갈멜산, 예수님의 변화산, 겟세마네 동산, 나사렛과 베들레헴, 길갈과 나사로의 무덤을 비롯하여 성경에서 수없이 읽어 온 여러 장소를 직접 밟았다. 그 어느 곳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곳이었다. 성경의 사건들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실제 땅과 역사 속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귀한 경험들이었다.

그러나 세계 여러 곳의 성경과 교회사 현장을 돌아보고 이스라엘의 수많은 성지를 다녀온 뒤에도 필자의 마음에 가장 오래, 가장 깊이 남은 곳은 뜻밖에도 화려하거나 웅장한 장소가 아니었다. 바로 텔 아랏, 곧 고대 예배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며 필자가 이 책에서 ‘아랏의 산당’이라 부르는 자리였다.

갈멜산의 장엄함과 변화산의 감격, 겟세마네의 숙연함, 베들레헴과 나사렛의 기억, 소아시아 일곱 교회와 로마와 아테네와 고린도의 역사적 감동보다 아랏에서 느낀 비애가 필자의 마음을 더 오래 붙들었다. 그곳에서 지성소를 가리키는 “HOLY OF HOLIES”라는 표지가 필자의 눈을 붙들었다. 곧 ‘지성소’라는 뜻이었다. 거룩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글자를 바라보는 순간 필자의 마음에는 감격보다 오히려 깊은 비애가 밀려왔다.

왜 그랬을까. 그 질문은 텔 아랏을 떠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다른 성지를 돌아본 뒤에도, 설교를 준비할 때에도, 교회의 현실을 바라볼 때에도 그 장면은 계속 필자의 마음속에 되살아났다. 거룩한 이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 중심에 계시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첫 자리에 계시는가. 예배의 형식이 남아 있다고 해서 그 예배의 질서까지 바르게 서 있는가.

시간이 흐를수록 질문은 더욱 분명해졌고, 마침내 한 문장으로 모아졌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필자가 2007년 이스라엘 성지에서 직접 촬영한 아랏 산당의 사진을 이 책의 표지에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사진은 단순히 책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이 아니다. 필자에게 아랏은 과거 이스라엘의 실패만을 보여 주는 유적이 아니라 한국교회와 필자 자신을 다시 하나님 앞에 세운 질문의 현장이었다.

그 앞에서 필자는 “내 설교보다 하나님이 높으신가. 내 신학적 판단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높으신가. 내가 속한 조직보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가. 교회의 성공보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중요한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정치적 판단과 이념까지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놓여 있는가”를 묻게 되었다. 그래서 이 표지 사진은 독자에게도 같은 질문을 건네는 하나의 증언이다.

당시 필자가 직접 촬영한 동영상 역시 그 현장을 보여 주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2. 산당에서 시작된 질문

― 거룩한 이름보다 중요한 것은 중심이다

오늘날 텔 아랏에서 발견된 이 예배 유적은 고고학적으로 유다 왕국 시대의 성전 또는 성소로 설명된다. 필자가 이 책에서 이곳을 ‘아랏의 산당’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고고학적 명칭으로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루살렘 성전 밖에 존재했던 이 예배처를 바라보며 성경에서 반복하여 나타나는 산당의 문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산당이 처음부터 똑같은 의미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배의 질서를 세우신 뒤에도 백성들이 자기 편의와 정치적 필요와 관습을 따라 산당을 유지하고, 하나님께 드린다는 이름 아래 잘못된 예배와 혼합된 예배를 계속했을 때 산당은 심각한 신앙적 문제가 되었다. 문제는 단순히 높은 곳에 제단이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떠나 사람이 정한 방식으로 예배를 바꾸었다는 데 있었다.

사람은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은가”, “모두가 이렇게 하지 않는가”, “시대가 달라지지 않았는가”, “국가가 요구하는 일이 아닌가”,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기 시작할 때 예배의 외형은 그대로 있으면서도 그 중심은 달라질 수 있다. 거룩한 이름은 남아 있는데 하나님께서 첫 자리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

필자가 아랏에서 느꼈던 비애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스라엘에서 돌아온 뒤에도 아랏에서 받은 충격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감정은 필자의 생각과 말씀 속에 계속 남아 있었다. 교회와 예배를 바라볼 때에도, 교회 지도자와 국가와 정치권력을 바라볼 때에도, 그리고 필자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같은 질문이 따라왔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처음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문제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오늘의 문제로 다가왔다.

하나님보다 사람이 앞설 수 있고, 돈이 앞설 수 있으며, 교회의 성장과 성공, 교단과 조직, 국가와 정치권력, 민족과 이념이 앞설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깊은 곳에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다. 산당은 결국 장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리의 문제였다. 하나님께 속한 첫 자리를 누가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3. 2013년 1월 13일, 아랏의 질문이 다시 불붙다

그렇게 2007년 아랏에서 시작된 문제의식을 품고 지내던 중, 2013년 1월 13일 필자의 마음에 그 질문을 다시 강하게 일으키는 일이 있었다. WCC 제10차 부산총회를 앞두고 명성교회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홍재철 목사, WEA 총회 준비위원장 길자연 목사,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WCC 총회 한국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 김삼환 목사가 WCC 제10차 부산총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필자에게 이 사건은 단순한 교계 행사가 아니었다. 2007년 아랏에서 느꼈던 비애와 질문이 다시 불붙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연합은 중요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가 하나 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연합이라는 이름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수 있는가. 종교간 대화와 타종교인에 대한 존중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복음의 유일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은 어디에 놓여야 하며, 교회연합과 진리는 어떤 관계에 있어야 하는가.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2013년 1월 17일부터 WCC 반대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단순히 성명을 발표하거나 집회에 참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부가 WCC 제10차 부산총회에 지원하기로 한 예산의 집행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직접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하였으며 문화체육관광부를 찾아가 정부의 예산 지원에 항의하는 시위도 벌였다.

또한 WCC고발운동본부를 만들고 관련 자료와 필자의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알려 왔다.

그러나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필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WCC 반대운동을 했는가를 자랑하는 데 있지 않다. 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했다는 사실이나 문화체육관광부를 찾아가 항의했다는 사실, 어떤 조직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의 중심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2007년 텔 아랏에서 시작된 질문이 2013년 한국교회의 현실 앞에서 다시 불붙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WCC를 향해서만 머무를 수 없었다. WCC를 반대하는 운동 자체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있는가. 운동의 조직도 우상이 될 수 있는가. 그 운동의 지도자도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할 수 있는가. 참여자의 숫자와 영향력과 성과가 하나님보다 중요해질 수 있는가. ‘나는 옳다’는 확신마저 자기 의가 될 수 있는가. 결국 질문은 필자 자신에게 다시 돌아왔다.

“나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있는가.”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운동조차 이 질문을 잃어버리는 순간 또 하나의 산당이 될 수 있다.

4. 나라의 위기 앞에서 다시 교회를 돌아보다

2013년 이후에도 필자의 문제의식은 끝나지 않았다. 교회와 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라는 질문은 계속 다른 모습으로 필자 앞에 나타났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의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지고,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을 둘러싼 사태가 이어졌다. 필자는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모두 21차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여러 언론에 전면광고를 게재하고, 국회를 비롯한 여러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열며 필자의 문제의식을 국민과 교회에 알리고자 하였다.

많은 시간과 비용과 노력을 들였지만, 그 과정이 지나간 뒤 필자는 노력에 비하여 성과가 너무도 미미하다고 느끼며 다시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교회는 나라의 중대한 문제 앞에서도 그토록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을까. 왜 많은 목회자들이 사회와 국가의 문제를 자기와 관계없는 일처럼 바라보았을까. 필자는 그 원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동안의 활동을 돌아보며 오늘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위기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한국교회의 책임이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의 무기력과 침묵을 돌아보면서 그 중요한 책임 가운데 하나가 목회자들에게 있으며, 목회자들의 소극적인 태도 뒤에는 ‘정교분리’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깊이 자리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실제로 일부 목회자들로부터 이런 말을 듣기도 하였다. “목사님, 정교분리도 모르세요. 왜 그렇게 나서세요.” 그 말을 들으면서 필자는 한국교회 안에 자리 잡은 정교분리에 대한 인식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정교분리 개념이 왜곡되어 사용된 문제도 다시 살펴보게 되었다.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들이 정교분리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 문제의식에서 『정교분리의 재구성과 한국형 새 이론 7-E 모델』을 집필하였다.

그러나 정교분리를 바로 이해하는 것만으로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남아 있었다. 교회는 지금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모시고 있는가.

5.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로 이어진 질문

정교분리의 문제를 바로 세우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 깊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교회 자체가 살아 있는가. 교회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가. 교회가 사람과 돈과 권력과 조직보다 하나님을 먼저 모시고 있는가.

바로 여기에서 필자의 문제의식은 다시 2007년 텔 아랏으로 돌아갔다. 정교분리를 바로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교회가 누구를 첫 자리에 모시고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8·15 광복절을 맞이하면서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는 제목으로 시리즈를 이어가기 시작하였다.

제1권 『새 덩어리가 되라』에서는 교회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묵은 누룩을 버리고 새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문제를 다루었다. 제2권 『교회의 사명과 실천』에서는 회개한 교회가 어떻게 나라와 사회를 섬기고 그 사명을 실제 삶 속에서 실천할 것인가를 다루었다.

그리고 이 모든 질문을 더 깊이 거슬러 올라가면서 마지막에 다시 한 가지 근본적인 문제 앞에 서게 되었다. 왜 교회는 반복해서 무너지는가. 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사람과 돈과 권력과 국가와 이념과 조직을 하나님보다 앞세울 수 있는가. 왜 거룩한 이름 아래 또 다른 산당이 세워지는가.

그 질문의 마지막에는 2007년 텔 아랏에서 시작된 바로 그 질문이 있었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그래서 이 시리즈의 마지막 제4권을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라는 제목으로 집필하게 되었다.

결국 이 책은 갑자기 시작된 책이 아니다. 2007년 아랏에서 느꼈던 비애, 2013년 WCC 문제를 바라보며 다시 불붙었던 질문, 나라의 위기 속에서 교회의 무기력과 목회자들의 잘못된 정교분리 인식을 경험하며 얻은 문제의식, 그리고 『정교분리의 재구성과 한국형 새 이론 7-E 모델』과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시리즈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하나의 질문을 따라온 결과이다. 그 질문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6. 남의 죄를 찾기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다

우상숭배를 말하면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죄를 발견한다. 솔로몬과 여로보암의 잘못을 보고, 1938년 신사참배를 받아들인 한국교회의 실패를 보며, 북한의 지도자 우상화와 교권·정치권력·종교혼합의 문제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 책이 거기서 끝난다면 아랏에서 시작된 질문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어떠한가.”

다른 사람의 지도자 숭배를 비판하면서 내가 지지하는 지도자를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국가우상화를 비판하면서 내가 사랑하는 국가와 민족을 하나님보다 높이고 있지는 않은가. 종교혼합을 비판하면서 내가 가진 신학과 교단을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교권을 비판하면서 내가 가진 권위와 영향력은 내려놓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돈과 성공을 비판하면서 내 사역과 조직의 성과를 자랑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이 책의 질문은 ‘그들이’에서 끝날 수 없다. 다니엘은 조상들과 왕들과 백성의 죄를 고백하면서 자신을 그 역사 밖에 두지 않았다. 그의 고백은 “그들이 범죄하였습니다”가 아니라 “우리가 범죄하였습니다”였다. 이것은 조상의 개인적인 죄책이 후손에게 자동으로 이전된다는 뜻은 아니다. 개인의 죄책과 공동체의 역사적 책임은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부흥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라고 말하면서 실패의 역사만 과거 사람들의 일이라고 밀어낼 수도 없다. 1907년 평양대부흥도 우리의 역사이고, 1938년의 신사참배도 우리의 역사다. 순교와 저항도 우리의 역사이며, 해방 이후의 회개와 갈등도 우리의 역사다. 이 책은 그 역사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자 한다.

7. 기억은 회개를 위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비극을 기억한다. 그 대표적인 날 가운데 하나가 아브월 9일, 곧 티샤 베아브(Tisha B’Av)이다. 필자가 아브월 9일에 주목하는 것은 날짜 자체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기 때문도, 숫자가 재앙을 일으킨다고 주장하기 때문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잊지 않는 기억이다.

성전의 파괴와 예루살렘의 비극을 기억하며 자기 역사와 신앙을 돌아보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교회에도 이러한 기억이 필요하다고 본다. 부흥만 기억해서는 안 되며 실패도 기억해야 한다. 감사할 것은 감사하고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의 아브월 9일’은 유대인의 역사적 기억에서 교훈을 얻어, 한국교회가 자신의 실패를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와 새로운 순종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자가 제안하는 신앙적·해석적 표현이다. 한국교회의 실패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다시 하나님 앞에 서자는 필자의 신앙적 표현이다.

이 기억은 오늘의 세대에서 끝나서도 안 된다. 과거의 죄책을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신앙의 기준을 전하기 위해 다음 세대에도 정직하게 가르쳐야 한다. 부흥과 순교의 역사만이 아니라 교회가 잘못했던 역사도 함께 가르칠 때, 다음 세대는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8. 8·15의 은혜와 9·9의 경고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고,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필자는 8·15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로 바라본다. 그러나 외적인 해방이 모든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교회에는 신사참배의 역사를 어떻게 회개하고 정리할 것인가라는 과제가 남아 있었고,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려 서로 다른 정치체제가 만들어졌다.

1938년 9월 9일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1948년 9월 9일에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고, 2016년 9월 9일에는 북한의 제5차 핵실험이 있었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적 날짜들을 하나의 신앙적 경고와 기억의 표지로 바라본다. 8·15가 해방과 감사의 은혜를 기억하게 한다면, 9·9는 한국교회와 민족이 자신의 역사 속 실패와 경고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기억은 날짜 자체에 의미를 두는 데 있지 않고, 그 날짜에 새겨진 역사를 통하여 오늘의 신앙을 성찰하고 회개와 순종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숫자 9나 9월 9일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다는 뜻도 아니며, 1938년의 사건 때문에 정확히 10년 뒤 북한 정권이 세워졌거나 세 사건이 직접적인 역사적 인과관계로 연결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날짜는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표지다. 8·15를 은혜와 감사의 기억으로, 9·9를 실패와 경고와 회개의 기억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9. 회개는 십자가로 간다

회개는 죄책감에서 끝나지 않는다. 회개의 목적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회개행위 자체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는 근거는 아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길은 우상숭배에서 회개로, 회개에서 십자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과의 화목과 회복으로 이어진다.

10. 이 책이 걸어가는 길

이 책에서 다루는 아랏의 산당과 아브월 9일, ‘한국의 아브월 9일’, 8·15와 9·9, 신사참배와 6·25, 오늘의 산당은 서로 떨어진 별개의 주제가 아니다. 그 모든 주제를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다. 하나님께만 속한 자리를 우리는 무엇에게 내어주었는가.

이 책은 그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것이 차지하는 우상숭배와 예배질서의 전복을 드러내고, 한국교회가 그 죄를 남의 죄로만 돌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촉구하고자 한다.

이 책의 목적은 한국교회가 자신의 역사를 정직하게 돌아보고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다시 회복되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교회도, 나라와 민족도, 사람과 조직도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11. 마지막까지 남는 질문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사람인가, 돈인가, 권력인가, 국가인가, 민족인가, 이념인가, 교단인가, 운동인가, 자기 자신인가. 아니면 하나님인가.

이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먼저 던질 질문이 아니다. 필자가 먼저 그 앞에 서야 하고, 한국교회가 그 앞에 서야 하며, 모든 신앙인이 그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무엇을 해 드려야 비로소 하나님이 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 문제는 우리가 삶과 예배 속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리를 다른 것에게 내어주는 데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의 자리로, 돈은 도구의 자리로, 권력은 섬김의 자리로, 국가는 국가의 자리로, 정치와 이념은 그 본래의 자리로, 교단과 조직은 사명을 돕는 자리로, 자기 자신은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첫 자리는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산당을 허문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단순히 무엇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무너진 예배의 질서를 다시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 권위의 자리에 놓으며,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이다. 이 책의 처음과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하나다. “누가 하나님의 자리에 서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이 책의 대답도 하나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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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 류 3.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 목차 ”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목차

들어가는 글
  1. 수많은 성지 가운데 가장 깊이 남은 아랏
  2. 산당에서 시작된 질문
  3. 2013년 1월 13일, 아랏의 질문이 다시 불붙다
  4. 나라의 위기 앞에서 다시 교회를 돌아보다
  5.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로 이어진 질문
  6. 남의 죄를 찾기보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다
  7. 기억은 회개를 위한 것이다
  8. 8·15의 은혜와 9·9의 경고
  9. 회개는 십자가로 간다
  10. 이 책이 걸어가는 길
  11. 마지막까지 남는 질문

제1장 산당 안의 “HOLY OF HOLIES”
  제1절 산당이라는 말과 성경의 예배질서
  제2절 성전 이전의 산당과 기브온의 사례
  제3절 성전이 세워진 뒤에도 남아 있던 산당
  제4절 산당은 어떻게 우상숭배와 혼합예배의 장소가 되었는가
  제5절 아랏 산당의 “HOLY OF HOLIES”가 던지는 질문
  제6절 제1계명과 제2계명이 산당에 던지는 경고
  제7절 사람의 방식이 하나님의 질서를 대신할 때
  제8절 산당과 신사참배에서 발견하는 공통된 경고
  제9절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제2장 산당을 버리지 못한 이스라엘
  제1절 약속의 땅에 들어간 백성과 남겨 둔 산당
  제2절 솔로몬 ― 성전을 세운 왕이 산당도 세우다
  제3절 분열왕국과 여로보암 ― 정치적 두려움이 예배를 바꾸다
  제4절 벧엘과 단 ― 왕권이 예배체계를 다시 설계하다
  제5절 여로보암의 8월 15일과 대한민국의 8월 15일
  제6절 여로보암의 길에서 아합과 이세벨까지 ― 제도화된 우상숭배
  제7절 하나님은 심판 전에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제8절 북이스라엘은 왜 먼저 무너졌는가
  제9절 남유다의 산당과 히스기야의 개혁
  제10절 므낫세 ― 허문 산당을 다시 세우다
  제11절 요시야 ― 말씀 앞에서 다시 시작된 개혁
  제12절 경고를 거부한 남유다와 성전 파괴

제3장 모리아산에서 아브월 9일까지
  제1절 모리아 ― 순종의 자리에서 시작된 이야기
  제2절 모리아산과 성전 ― 순종의 자리에서 예배의 자리로
  제3절 성전은 안전보장이 아니다 ― 예레미야에서 바벨론 포로까지
  제4절 아브월 9일은 무엇인가 ― 성경의 기록과 유대 전승의 구별
  제5절 성전 파괴의 기억에서 회개로
  제6절 회복된 성전도 영원한 안전보장은 아니었다
  제7절 실패를 기억하는 신앙 ― 한국교회가 배워야 할 것

제4장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까지
  제1절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 경고를 보고도 돌이키지 못한 역사
  제2절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지다
  제3절 바벨론 포로 ― 상실 속에서 다시 묻기 시작하다
  제4절 성전을 잃고 다시 말씀과 신앙의 정체성을 붙들다
  제5절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 고레스와 귀환의 길
  제6절 귀환 이후 ― 예배와 성전을 다시 세우다
  제7절 말씀과 공동체를 다시 세우다 ― 에스라와 느헤미야
  제8절 제2성전 시대 ― 회복 이후에도 다시 찾아온 위기

제5장 신사참배 ― 예배질서의 전복
  제1절 신사와 신도, 국가신도 ― 신사참배의 역사적·종교적 배경
  제2절 신사참배와 성경적 경계 ― 국민의례인가, 예배의 문제인가
  제3절 전시체제와 황국신민화 ― 학교와 교회로 들어온 국가의 요구
  제4절 평양의 부흥에서 1938년 제27회 총회까지
  제5절 한 번 무너진 예배의 경계 ― 신사참배의 본질
  제6절 끝까지 예배의 첫 자리를 지킨 사람들

제6장 한국의 아브월 9일 ― 8·15의 은혜와 9·9의 경고
  제1절 ‘한국의 아브월 9일’ ― 날짜가 아니라 기억과 회개의 원리
  제2절 1938년 제27회 총회 ― 국가권력 앞에서 무너진 예배의 경계
  제3절 8·15의 해방과 교회의 회개 ― 출옥성도와 교회재건
  제4절 해방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 자유와 분단의 과제
  제5절 북한 정권의 수립과 지도자 우상화 ― 국가·이념·수령의 절대화
  제6절 두 번의 9·9와 6·25 ― 역사적 원인과 공동체적 회개
  제7절 북한 핵개발과 네 번의 9·9 ― 숫자신비가 아닌 역사적 경고
  제8절 8·15의 감사와 9·9의 경고 ― 기억·회개·순종
  제9절 ‘한국의 아브월 9일’이 남기는 질문 ―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제7장 “그들이”가 아니라 “우리가”
  제1절 다니엘의 기도 ― “그들이”가 아니라 “우리가”
  제2절 공동체적 회개 ― 개인의 죄책과 역사적 책임을 구별한다
  제3절 징계와 선지자적 책임 ― 회개와 중보로 서는 교회
  제4절 회개는 오늘의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일이다
  제5절 “주여 들으소서, 용서하소서” ― 회복을 구하는 기도

제8장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회개와 갈등
  제1절 해방은 모든 문제를 끝냈는가
  제2절 신사참배 반대자와 출옥성도 ― 3일 금식기도
  제3절 회개 없이 교회재건이 가능한가 ― 「한국교회재건원칙」과 출옥성도들의 요구
  제4절 회개 요구와 교단갈등 ― 교권·신학·교회정치의 충돌
  제5절 고신의 형성과 제36회 총회 ― 회개와 분열의 역사
  제6절 6·25전쟁과 다니엘식 공동체적 성찰
  제7절 해방 이후 이어진 회개 ― 개별 회개와 대표적 공회개의 과제
  제8절 교단별 회개와 공동체적 기억 ― 1954년에서 2018년까지
  제9절 제8장이 남기는 결론 ― 회개에서 회복과 화해로

제9장 신사참배는 끝났지만 산당은 사라지지 않았다
  제1절 신사참배는 끝났지만 산당은 사라지지 않았다 ― 오늘의 우상숭배
  제2절 돈과 성공의 산당 ― 성장주의와 물질주의
  제3절 사람의 산당 ― 목회자·정치지도자·유명인을 절대화할 때
  제4절 교권과 조직의 산당 ― 교회정치가 복음보다 앞설 때
  제5절 정치권력의 산당 ― 자기편의 불의에 침묵할 때
  제6절 국가와 이념의 산당 ― 어떤 정치이념도 복음을 대신하지 못한다
  제7절 세상의 인정과 문화의 산당 ― 유행이 말씀보다 앞설 때
  제8절 종교혼합의 산당 ― 복음의 유일성과 신앙의 경계
  제9절 WCC 반대사역의 기록 ― 사역도 하나님 아래에
  제10절 가장 깊이 숨겨진 산당 ― 내 안의 산당을 먼저 찾는다

제10장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제1절 산당을 허문 뒤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 하나님께 첫 자리를 돌려드린다
  제2절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 권위로 세운다 ― 성경과 인간의 해석
  제3절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다
  제4절 사람과 세상의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 나라 사랑도 하나님 아래에 둔다
  제5절 회개란 무엇인가 ― 죄에서 떠나 하나님께 돌아간다
  제6절 인간의 회개가 화목의 근거인가 ― 은혜와 십자가가 근거다
  제7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 속죄와 화해의 중심
  제8절 화목하게 하는 직분 ― 진리와 사랑을 함께 붙든다
  제9절 하나님이 제자리에 계실 때 사람이 제자리를 찾는다 ― 제10장이 남기는 질문

제11장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제1절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의 의미 ―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 곧 사는 것인가
  제2절 살아 있는 교회는 하나님께만 예배한다 ― 살아 있는 교회는 진리와 사랑을 함께 붙든다
  제3절 교회가 산다는 것은 정치권력을 잡는 것인가 ―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때
  제4절 국가를 존중하되 국가를 숭배하지 않는다 ― 나라 사랑은 우상화와 달라야 한다
  제5절 교회가 나라에 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 ―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의 정확한 의미

맺는말
  제1절 다시 아랏에서 ― 역사가 남긴 경고
  제2절 한국교회의 실패와 해방, 분단의 기억
  제3절 “그들이”가 아니라 “우리가” ― 십자가와 화해의 길
  제4절 하나님께 돌아가자 ―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

참고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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