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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  
       
 gkuboard
Great Korea Union Home

   
  38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6-02-21 (토) 15:08
분 류 Sermon
ㆍ조회: 3      
http://www.greatkoreaunion.com/cafe/?gkuboard.640.7
“ 참조 링크 ”

- 사도신경 형성과정 관련 자료 
http://www.greatkoreaunion.com/board/board.php?board=gkuboard&category=22&set_shape=bbs

- Theology(신학) 자료실 
http://www.greatkoreaunion.com/board/board.php?board=gkuboard&category=25&set_shape=bbs

     
  37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6-02-21 (토) 01:00
분 류 Sermon
ㆍ조회: 12      
http://www.greatkoreaunion.com/cafe/?gkuboard.634.7
“ 그는 왜 ‘사도복음’을 강조하는가 ”
그는 왜 ‘사도복음’을 강조하는가 
― 복음을 말하는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서론 ― ‘사도복음’이라는 말이 가지는 힘

그의 가르침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 표현 가운데 하나는
“사도복음”이라는 말이다.

이 8표현은 처음 들을 때 매우 정통적으로 들린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
초대교회의 순수한 복음,
제도화 이전의 원형적 복음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표현을
의심하기보다 오히려 신뢰하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사도복음’이라는 말이 존재하는가가 아니라,
그 말이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가이다.


1. 그의 주장 ― 사도는 지금도 계속 세워질 수 있는가

그는 자주 다음과 같은 논리를 강조한다.

• 예수께서 처음 열두 사도를 세우셨다 
• 이후 가룟 유다의 자리를 대신해 마띠아가 세워졌다 
• 또 바울이라는 사도가 등장하였다 
• 그러므로 하나님은 언제든 새로운 사도적 권위를 세우실 수 있다 

이 논리 안에서
사도직은 역사적으로 마무리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확장될 수 있는 구조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자연스럽게 다음 주장으로 이어진다.

“오늘날에도 사도적 권위가 가능하며,
그 권위로 전해지는 가르침은 사도복음이라 할 수 있다.”


2. 성경이 말하는 사도 선택 사건의 의미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마띠아가 세워지는 장면은
새로운 사도 제도의 시작이라기보다
기존 공동체의 기초를 정리하는 사건에 가깝다.

마띠아에게 요구된 조건은 분명했다.

• 예수님의 공생애 처음부터 함께한 사람 
•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사람 

이 조건은
사도직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사도 공동체의 출발선을 맞추기 위한 한시적 보충을 보여 준다.

즉,
사도 선택은 확장이 아니라 완성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3. 바울은 새로운 사도 제도의 근거인가

그는 바울을 예로 들어
하나님이 이후에도 사도를 세우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 자신의 증언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부르며,
자신의 사도됨을 새로운 복음을 만드는 근거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바울의 사명은
복음을 새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복음을 이방 세계로 확장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기초를 다시 놓는 자가 아니라,
이미 놓인 기초 위에 세우는 일꾼으로 이해하였다.


4. ‘사도복음’이라는 말이 만들어 내는 전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도 선택 사건과 바울의 사례가
복음의 증언이 아니라
새로운 권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될 때,
‘사도복음’이라는 말은 다른 기능을 하게 된다.

그 구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 지금의 교회는 사도적 복음을 잃어버렸다 
• 참된 사도복음은 따로 존재한다 
• 그것은 특정한 해석을 통해 회복되어야 한다 

이 순간,
사도는 증인이 아니라 해석자가 되고,
복음은 선포가 아니라
통과해야 할 체계로 변하게 된다.


5. 권위의 이동이 만들어 내는 구조

이러한 구조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타난다.

• 기존 교회는 불완전한 공동체가 되고 
• 기존 목회자와 신앙 전통은 의심의 대상이 되며 
• 특정 가르침만이 사도적 복음으로 이해된다 

이때 ‘사도복음’이라는 말은
복음을 설명하는 표현이 아니라,
복음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기능하게 된다.

문제의 핵심은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복음을 정의하는 권위가 어디에 놓이는가이다.


6. 성경이 말하는 사도성과 복음

신약에서 사도들은
자신들의 가르침을 특별한 이름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이 반복해서 선포한 것은
단 하나의 복음이었다.

사도적이라는 말은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복음을 증언하는 위치를 의미하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성은
복음을 재구성하는 권위가 아니라,
복음을 변하지 않게 지키는 증언의 자리였다.


7. 결론 ― 사도복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도복음은
새로운 복음이 아니다.

더 깊은 단계의 복음도 아니며,
특정 해석을 통과해야만 접근할 수 있는 체계도 아니다.

사도복음은
사도들이 끝까지 증언한 동일한 복음을 가리킨다.

그 표현이
그리스도를 더 분명히 드러내는 데 사용될 때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표현이
특정 해석 체계를 절대화하고,
기존 교회를 무효화하며,
복음 앞에 새로운 조건을 세우는 도구가 될 때,
문제는 복음의 순수성이 아니라
권위의 방향으로 이동하게 된다.


8. 전체 흐름에 대한 최종 정리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주장들은
단순한 교리 차이가 아니라,
복음의 기준이 어디에 놓이는가라는 질문으로 모아진다.

복음이 은혜의 선포로 남아 있는지,
아니면 특정 해석 체계의 이해와 수용을 전제로 하는 구조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분별의 기준이 될 것이다.

결국 참된 분별은
새로운 주장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부에서가 아니라,
복음이 본래의 단순성과 은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피는 데서 시작된다.


※ 참고 안내

본 글은 집회에서 제시된 가르침의 구조를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점검하기 위한 글이다. 지면의 한계로 인해 각 항목에 대한 상세한 신학적 논증과 역사적 자료는 모두 포함하지 못하였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과 자료는 본 홈페이지 내에 게시된 다음 자료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 사도신경 형성과정 관련 자료 

http://www.greatkoreaunion.com/board/board.php?board=gkuboard&category=22&set_shape=bbs




- Theology(신학) 자료실 
http://www.greatkoreaunion.com/board/board.php?board=gkuboard&category=25&set_shape=bbs






2026년 2월 21일

박동호 목사

     
  36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6-02-18 (수) 23:44
분 류 Sermon
ㆍ조회: 12      
http://www.greatkoreaunion.com/cafe/?gkuboard.620.7
“ 그는 왜 ‘사도복음’을 주장하는가 ”
그는 왜 ‘사도복음’을 주장하는가
― 열둘 이후의 사도, 그리고 복음을 말하는 권위의 문제


서론 ― 왜 ‘사도복음’이라는 말은 특별하게 들리는가

그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하나는 “사도복음”이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처음 들을 때 매우 강한 신뢰를 준다.
왜냐하면 ‘사도’라는 단어 자체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초기적이고, 가장 순수하며, 가장 권위 있는 이미지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증언한 사람들이고,
초대교회는 바로 이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사도복음”이라는 말은
마치 모든 논쟁을 단번에 정리해 주는 기준처럼 들린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표현은 더욱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문제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사도복음’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도록 사용되고 있는가에 있다.


1. 그의 핵심 주장 ― 열둘 이후의 둘

그는 예수께서 처음에 열두 사도를 세우셨으나,
이후 두 사도를 더 세우셨다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

마띠아와 바울의 사례를 들어
사도는 언제든지 하나님에 의해 추가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오늘날도 새로운 사도적 권위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가르침이 사도적 복음의 연장선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은 구조로 전개된다.

• 열두 사도는 절대적인 숫자가 아니다 
• 하나님은 필요에 따라 사도를 더 세우신다 
• 그러므로 지금도 새로운 사도적 권위가 가능하다 
• 그 권위로 전해지는 가르침은 ‘사도복음’이라 불릴 수 있다 


2. 사도 선택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은
유다의 빈자리를 대신할 사도를 세운다.
이때 선택된 사람이 마띠아다.

그러나 이 선택에는
매우 분명하고 제한적인 조건이 붙는다.

• 예수님의 공생애 처음부터 함께한 사람 
•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사람 

마띠아는
새로운 기준을 가진 사도가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와 함께했던 증인의 보충이었다.

즉, 이 사건은
사도직의 확장이 아니라
열둘이라는 상징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사도 공동체의 기초를 새로 놓는 사건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기초를 정리하고 출발선을 맞추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사도는 언제든 새로 세워질 수 있다”는 일반 원리를 제시하지 않는다.


3. 바울은 새로운 사도 제도의 근거가 되는가

그는 종종 바울을 예로 들며
“보라, 하나님은 나중에 또 다른 사도를 세우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 자신의 증언은
이 주장과는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바울은 스스로를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자신의 사도됨을
새로운 계시 체계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다른 복음은 없다.”

바울의 사도직은
복음을 새로 정의하는 권위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복음을
이방 세계로 확장하는 일이었다.

그는 기초를 다시 놓는 자로 이해하지 않았다.
이미 놓인 기초 위에 세우는 일꾼으로 이해했다.


4. ‘사도복음’이라는 말이 만들어 내는 전환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사도 선택 사건이
복음의 증언이 아니라
자기 권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전환될 때이다.

‘사도복음’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역사적 표현이 아니라
현재의 교회를 평가하고 선별하는 기준으로 기능하게 된다.

즉,

• 지금 교회가 전하는 복음은 불완전하거나 왜곡되었고 
• 사도 시대의 복음은 따로 있으며 
• 그 사도적 복음은 오늘날 특정한 방식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이 순간,
사도는 증인이 아니라 해석자가 되고,
복음은 선포가 아니라 재정의의 대상이 된다.


5. 권위의 이동이 만들어 내는 구조

이 구조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 기존 교회는 사도적이지 않게 되고 
• 기존 목회자는 복음을 왜곡한 자가 되며 
• 오직 특정 체계만이 참된 사도복음이 된다 

이 구조는
복음을 지키는 구조라기보다,
권위를 독점하는 구조에 가깝다.

사도적이라는 말은
교회를 살리는 기준이 아니라,
교회를 재단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6. 성경이 말하는 사도성과 복음

성경에서 사도는
복음을 정의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복음을 증언하는 사람이다.

사도들의 권위는
‘새로운 내용’을 말할 권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할 권위였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우리가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성은
복음을 확장할 수는 있어도,
복음을 재구성할 수는 없다.


7. 사도복음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도복음은
새로운 복음이 아니다.

더 깊은 복음도 아니다.

사도복음은
오직 하나의 복음을 끝까지 증언한 복음이다.

사도들은
자기 자신을 전파하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전파하며,
우리는 예수를 위하여 너희의 종이 되었노라.”


8. 전체 구조의 귀결

이제 우리는 이 가르침 전체를
하나의 흐름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다.

율법은 다시 앞에 세워졌고,
회개는 끝없는 자기 점검으로 바뀌었으며,
천국은 다른 단계로 이동해야 할 목표가 되었고,
그 모든 구조를 정당화하는 이름으로
‘사도복음’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복음은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끈다.

복음은
우리가 완성해야 할 체계가 아니라,
우리가 신뢰하도록 주어진 선물이다.

그리고 사도적이라는 말은,
그 선물 위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9.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은
단순한 교리 차이가 아니라,
복음을 정의하는 권위가 어디에 놓이는가의 문제이다.

사도복음이라는 말이
그리스도를 더 분명히 드러내는가,
아니면 특정 해석을 절대화하는가.

문제는 사도라는 단어가 아니라,
그 단어가 누구를 가리키게 만드는가이다.

이 질문 앞에서
각 사람은 스스로 분별해야 한다.

결국 참된 분별은
복음이 본래의 단순성과 은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살피는 데서 시작된다.


참고 안내

본 글은 집회에서 제시된 가르침의 구조를 개괄적으로 정리하고 점검하기 위한 글이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본 홈페이지 내 자료를 참조하기 바란다.

- 사도신경 형성과정 관련 자료 

http://www.greatkoreaunion.com/board/board.php?board=gkuboard&category=22&set_shape=bbs

- Theology(신학) 자료실 
http://www.greatkoreaunion.com/board/board.php?board=gkuboard&category=25&set_shape=bbs


2026년 2월 21일

박동호 목사

     
  35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6-02-16 (월) 16:21
분 류 Sermon
ㆍ조회: 10      
http://www.greatkoreaunion.com/cafe/?gkuboard.614.7
“ 교회의 직분과 초대교회 회복 주장에 대한 신학적 입장 ”
교회의 직분과 초대교회 회복 주장에 대한 신학적 입장
(목자·장로·감독 개념의 통합적 이해와 축도의 중요성)
────────────────────────────


1. 문제 제기: “사도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와 그 위험성

최근 일부에서는 초대교회를 자주 인용하며, 이른바 “마가의 다락방의 사도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곧바로 올바른 신학이나 건강한 교회론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참된 회복은 구호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사도적 신앙의 실체(복음, 예배, 성례, 직분, 교회의 질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따르는 데서 시작됩니다.

초대교회는 무질서한 열정 공동체가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 위에서 예배와 교제와 권징과 직분이 정돈되어 가던 말씀 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주장 자체가 정당하려면, 초대교회가 실제로 무엇을 했고 어떤 구조를 가졌는지에 대한 정확하고 균형 잡힌 이해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2. 용어의 왜곡: “목사라는 직책은 성경에 없다”는 주장에 대하여

어떤 이는 “성경에 목사라는 직책은 없고 목자라는 말만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직분의 실체(기능과 사명)보다 명칭(단어)에 집착하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종종 동일하거나 유사한 직무를 서로 다른 표현으로 설명하며, 교회는 그 성경적 직무를 역사 속에서 더 분명히 구분하고 정리해 왔습니다.

교회가 ‘목사’라는 명칭을 사용해 온 것은 성경이 말하는 목자적 사역(돌봄)과 교사적 사역(가르침)을 수행하는 직무를 정리하기 위한 교회적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그 단어가 성경 본문에 그대로 없으니 직분 자체가 없다”는 논리는, 성경을 단어 목록처럼 다루는 비성경적 방식에 가깝습니다.


3. 초대교회에서 “목자·장로·감독” 개념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초대교회는 지도자의 직무를 설명할 때 주로 다음의 표현들을 사용했습니다.

- 장로(πρεσβύτερος, presbyteros): 공동체 안에서 세움 받은 지도자(직분)
- 감독(ἐπίσκοπος, episkopos): 돌보고 살피며 책임지는 감독(직무의 성격)
- 목자(ποιμήν, poimēn): 양 떼를 먹이고 보호하며 인도하는 목양(사명/이미지)

중요한 점은 초대교회에서 이 개념들이 종종 서로 분리된 전혀 다른 집단을 가리키기보다, 동일한 목회적 직무의 서로 다른 측면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 “장로”는 직분(세움)을 강조하는 표현이고,
- “감독”은 책임과 돌봄(관리·감독)의 기능을 강조하며,
- “목자”는 목양과 말씀 사역(먹임과 보호)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즉, 초대교회는 말씀을 맡아 가르치고, 성도를 돌보며, 교회를 감독하고, 질서를 세우는 지도자의 직무를 분명히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를 ‘목회자/목사’로 정리하여 부르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사도적 직무를 역사 속에서 더 명료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초대교회를 많이 인용하면서도 정작 초대교회가 지녔던 직분의 실체와 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초대교회의 ‘형식’을 말하면서 ‘내용’을 놓치는 모순이 될 수 있습니다.


4. 교회의 직분은 “권력”이 아니라 “보호 장치”다

성경이 직분을 주신 목적은 공동체를 지배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교회를 보호하고 양육하기 위한 은혜의 구조를 세우려는 데 있습니다.

- 교회는 가르침이 왜곡될 때 쉽게 무너집니다.
- 카리스마 있는 개인의 말이 말씀보다 앞설 때, 공동체는 혼란에 빠집니다.
- “나는 직분도 필요 없고 제도도 필요 없다”는 외침이 커질수록, 실제로는 개인의 해석과 개인의 권위가 교회를 지배하게 되는 역설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과 질서는 인간이 만든 억압 장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를 진리 안에 세우기 위해 허락하신 공적 책임의 체계입니다.


5. 모욕적 언어와 언어유희에 대하여: “목사=죽이는 자” 같은 주장

일부는 ‘목사(牧師)’라는 명칭을 한자의 표면만 가지고 왜곡하며, 심지어 “신자들을 죽이는 자”라는 식의 극단적 표현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이는 신학이 아니라 선동적 언어유희에 가깝습니다.

‘목(牧)’은 돌보고 먹이며 인도한다는 뜻이고, ‘사(師)’는 가르치는 자, 지도하는 자를 뜻합니다. 교회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직분의 본질을 훼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 떼를 돌보는 사명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교회 역사 속에 직분을 남용한 사례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직분 남용의 문제는 직분을 폐기함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직분을 더 거룩하게 회복하고, 더 엄격한 책임과 검증 아래 세우는 것이 바른 길입니다.


6. 말라기의 십일조 본문을 이용한 “목회자 일반 정죄”에 대하여

말라기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향한 회개 촉구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의 회복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오늘의 목회자들을 일괄적으로 “나쁜 사람”이라 규정하거나, 교회 공동체를 통째로 도둑 취급하는 방식은 성경 해석의 균형을 잃기 쉽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말씀 앞에서 재정의 정직과 청지기적 책임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 촉구의 말씀을 증오와 조롱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목적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위험한 태도입니다.


7. 축도의 신학적 의미와 중요성: “개인의 덕담”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 선포”

축도는 단순한 예배의 마무리 인사나 개인의 덕담이 아닙니다. 축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를 공적으로 선포하는 거룩한 행위이며, 교회의 예배 속에서 말씀 사역을 맡은 자를 통하여 시행되어 왔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축도가 “누가 하느냐”의 문제를 넘어, 교회의 공적 예배가 무엇인가, 직분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선포되는가의 문제라는 점입니다.

- 축도는 개인이 임의로 수행할 수 있는 사적 행위가 아니라,
- 교회가 인정한 직분과 질서 안에서,
- 하나님 앞에서 맡겨진 공적 사역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목회 직분을 부정하거나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흐름 속에서는, 축도의 의미 역시 쉽게 가벼워지고 왜곡될 위험이 큽니다. 축도를 경시하는 태도는 단순히 ‘형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예배의 공적 성격과 은혜의 선포 구조를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8. 결론: 참된 “초대교회 회복”은 직분과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말이 참되려면, 초대교회가 실제로 붙들었던 것을 붙들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 사도적 가르침(정통 교리)을 지키고,
-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며,
- 지도자의 직무(장로·감독·목자)를 통해 양 떼를 돌보고,
- 공적 예배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향한 건강한 개혁은 “직분을 무너뜨리는 급진”이 아니라, “직분을 거룩하게 회복하는 성경적 개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높이기 위해 직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질서를 지켜 공동체를 보호하고, 성도들이 바른 말씀 위에서 분별하며 자라가도록 하기 위해 이 문제를 밝힙니다.

우리 모두가 선동적 언어와 단편적 주장에 흔들리기보다, 성경 전체의 빛 아래서 교회를 이해하고, 교회의 질서와 예배의 거룩함을 지키며, 참된 은혜와 평강 안에서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2026년 2월 20일

박동호 목사
     
  34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26-02-16 (월) 15:31
분 류 Sermon
ㆍ조회: 13      
http://www.greatkoreaunion.com/cafe/?gkuboard.613.7
“ “ 축도를 하지 않는다.? - 교회의 질서와 축도의 의미에 대한 안내 ”
교회의 질서와 축도의 의미에 대한 안내


오늘날 다양한 주장과 해석들이 교회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우리는 감정적인 반응이나 사람 중심의 판단이 아니라, 성경과 교회의 바른 전통 위에서 신앙의 기준을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과 질서 위에 세우신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예배와 사역은 개인의 생각이나 주장보다,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와 공동체의 공적 질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돌보고 가르치며 인도하는 직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초대교회는 장로와 감독을 세우고, 양 떼를 목양하도록 맡겼으며, 이를 통해 공동체가 혼란이 아니라 질서 가운데 세워지도록 하였습니다. 교회가 오늘날 말씀을 맡아 섬기는 직분을 ‘목회자’ 또는 ‘목사’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성경적 사역을 계승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을 높이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책임의 자리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권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큰 섬김과 책임을 의미하며, 공동체가 진리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은혜의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분을 사람 중심으로 바라보기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특별히 축도는 예배의 마지막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은혜와 평강을 베푸시기를 선포하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축도는 개인의 덕담이나 사적인 인사가 아니라, 교회의 공적 예배 가운데 말씀 사역을 맡은 직분자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복의 선언입니다. 교회가 오랜 시간 이 전통을 소중히 지켜 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과 주장 속에서도 사람을 향한 정죄나 비난보다, 말씀 안에서 바른 이해와 분별을 세워 가야 합니다. 교회의 질서를 존중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배의 거룩함을 지켜 갈 때, 공동체는 더욱 건강하고 평안하게 세워질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교회의 질서와 은혜를 함께 지켜 가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강 가운데 신앙의 길을 걸어가기를 소망합니다.


2026년 2월 20일

박동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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